2026년 10월 15일 목요일

[동해 울릉분지 8광구 심해저] [소설판 5편(완결)] 흑조(黑潮)의 심연 : 자침과 심연의 침묵 (The Abyssal Silence) / 시추선 '해랑 4호' 조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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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V : FINAL CHAPTER (COMPLETE)

동해 울릉분지 8광구: 흑조(黑潮)의 심연
[제5편 완결] 자침과 심연의 침묵 (The Abyssal Silence)

1998년 10월 13일 03:45 ~ 2001년 10월 18일 | 대한민국 해군 제5성분전단 해난구조전대(SSU) 기밀 기록
사건 식별 1998-동해-8광구-해랑4호-침몰사건 (대외비 1급)
최후 발신 선임 공정감독 강태식 ("이것들은 육지로 나가선 안 된다.")
인양 수색선 해군 청해진함(ASR-21) 심해 무인잠수정(ROV-3000)

창문에 짓눌린 검은 기름 얼굴의 턱뼈가 기괴하게 벌어지며, 거미줄처럼 갈라진 40mm 방탄유리가 안쪽으로 비명을 질렀다.

“콰아아앙—!!”
강태식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붉은 아크릴 안전 덮개를 발로 걷어차 부순 뒤, 굵은 강철 와이어로 묶여 있던 최후의 비상 레버—**[비상 자침 및 하부 발라스트 폭파 장치(Emergency Scuttling Lever)]**를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내리꽂았다.

순간, 수심 25미터 아래 양측 폰툰(Pontoon) 내부 격실에 설치되어 있던 C-4 성형 작약 12기가 연쇄 기폭했다.

SUPPORT VESSEL // SEABOARD CAM 1998-10-13 03:48:12 KST ● EXPLOSION DETECTED
자침되는 시추선 해랑 4호
▲ [인근 보급선 원거리 망원 영상] 하부 부력 폰툰 폭발 후 35도 급경사로 침몰하는 해랑 4호. 120미터 높이의 데릭 타워가 동해의 거친 파도 속으로 꺾여 들어감.

거대한 주황색 화염이 폭풍우 치는 밤바다를 대낮처럼 밝혔다.
하부 폰툰이 찢어지며 바닷물이 수천 톤씩 빨려 들어가자, 3만 톤급의 거대한 해랑 4호가 오른쪽으로 35도 급격히 기울어졌다.

통제실 문을 부수고 쏟아져 들어오던 타르 범벅의 형체들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이 아닌, 쉭쉭거리는 파충류의 독기 뿜는 소리에 가까웠다.

“선장님, 살아서 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박진석이 기울어진 콘솔을 붙잡고 외쳤다.
“알고 있다.”
강태식은 블랙박스 수밀 컨테이너의 레코드 버튼을 누른 채 조용히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여기는 해랑 4호 공정감독 강태식. 울릉분지 8광구 해저 3,000m 암반에는 석유가 없다. 반복한다. 그곳에 매장된 것은 석유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알이다. 우리는 봉인을 뚫었다. 해랑 4호는 본선과 전 화물을 바다 속으로 자침시킨다. 절대 수색대를…… 보내지 마라.”

[선체 수직 전복 및 침몰 판정]
해랑 4호, 데릭(Derrick) 타워 붕괴 및 메인 데크 해수 완전 침범.
동경 130도 14분, 북위 36도 48분 해상에서 선박 레이더 신호 소멸.

쿠구구구궁—!!
그러나 바다는 이 강철 무덤을 쉽게 삼키지 않았다.

ROK NAVY RADAR // SATELLITE OPTICAL 1998-10-13 04:02:55 KST ● HYDRO-ANOMALY
심연의 바다 소용돌이
▲ [해양 위성 광학 관측선] 침몰 지점을 중심으로 직경 1.5km에 걸쳐 형성된 초거대 흑색 유기성 소용돌이. 중심부에서 수만 개의 검은 생체 촉수들이 솟구쳐 오름.

침몰하는 시추선의 둘레로 반경 1.5킬로미터의 바다가 검게 물들며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것은 단순한 와류가 아니었다. 3,000미터 심연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수억 개의 칠흑빛 점액질 촉수들이 바다 표면까지 뻗어 나와, 가라앉는 해랑 4호를 마치 요람에 감싸 안듯 심해 밑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바다는 단 한 조각의 부유물도, 구명조끼도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한 침묵 속으로 닫혔다.


MND CLASSIFIED ARCHIVE // FILE-8902 2001-10-18 DECLASSIFIED ● TOP SECRET
해군 비밀 인양 조사 보고서
▲ [해군 기밀 문서고] 사건 3년 뒤 비밀리에 작성된 제1급 해난구조전대 수색 보고서 서류철.

사건 발생 3년 뒤. 2001년 10월.
진해 해군작전사령부 지하 심층 문서고에 등록된 대외비 1급 서류철 하나가 열렸다.

[문서 번호: 2001-SSU-3000-08 // 대외비 제1급]
- 제목: 울릉분지 8광구 심해저 해랑 4호 선체 잔해 수색 및 블랙박스 수거 작전 결과 보고서
- 투입 장비: 해군 청해진함(ASR-21) 탑재 무인심해잠수정(ROV-3000)
- 수심: 해저 2,985미터 연약 지반
- 수거 물품: 티타늄 블랙박스 오디오 캡슐 1구, 선교 외벽 잔해 일부

조사단의 잠수정 ROV-3000이 해저 3,000미터의 칠흑 같은 암흑을 뚫고 도달했을 때, 카메라에 잡힌 잔해의 모습은 통상적인 난파선의 모습이 아니었다.

ROV-3000 HD-CAM // DEPTH: 2,985m 2001-10-14 11:28:44 KST ● UNDERWATER RECOVERY
심해저에 융합된 선체 잔해
▲ [ROV 심해 탐사 카메라] 해저 2,985m 진흙 바닥. 찌그러진 해랑 4호의 강철 골조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고대 생체 조직, 석회화된 흑색 껍질과 완전히 한 몸으로 유착·석화되어 호흡하듯 미세하게 박동하고 있는 모습.

해랑 4호의 거대한 강철 기둥과 갑판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것들은 해저 진흙 속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선체 전체가 직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생체 조직의 심장부와 신경망처럼 단단히 뒤엉켜 융합되어 있었다.

강철과 살점, 케이블과 혈관이 하나로 녹아붙은 그 기괴한 복합체는, 영하의 심해 수온 속에서도 3분에 한 번씩 미세한 저주파 진동을 일으키며 숨을 쉬고 있었다.

“선교 통제실 방탄 창문 안쪽에…… 무언가 있습니다.”
ROV 조종사가 헤드셋 너머로 작게 속삭였다.

탐조등 불빛이 깨진 통제실 창틀 안쪽을 천천히 비추었다.
그곳에는 3년 전 자침 레버를 쥐었던 강태식의 잠수 작업복이 강철 격벽에 석회화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잠수 헬멧의 두꺼운 유리 너머에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은 백탁(白濁)의 하얀 안구가, ROV의 렌즈를 향해 천천히 정면으로 회전했다.

[작전 종결 및 영구 출입 금지구역 지정]
2001년 10월 22일부로 동해 울릉분지 8광구 반경 15해리 전 해역을 '특수 군사 훈련 및 수심 불명 암초 구역'으로 명명하여 민간 선박의 항해 및 시추 탐사를 영구 금지함.
심연의 문은 닫혔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 아래에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다.

- [동해 울릉분지 8광구: 흑조(黑潮)의 심연] 전 5편 완결 -

심해저 유착 생명체

[동해 울릉분지 8광구 심해저] [소설판 4편] 흑조(黑潮)의 심연 : 올블랙 (Total Blackout) / 시추선 '해랑 4호' 조난록

MAIN POWER LOAD
12.4 MW
POWER DISTRIBUTION BUS
4,160V // S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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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IV : TOTAL BLACKOUT

동해 울릉분지 8광구: 흑조(黑潮)의 심연
[제4편] 올블랙 (Total Blackout)

1998년 10월 13일 03:10 | 대한민국 동해 북동 120km 해상 | 반잠수식 시추선 해랑 4호 중앙 통제실
작전 상황 메인 디젤 발전기 연쇄 트립 (Total Blackout) 및 거주구 격벽 침투
통제실 당직 선임 공정감독 강태식, DP 운항사 박진석, 3등 기관사 임현우
선내 전력 상태 메인 6,000kW 발전기 4기 전소 // 비상 배전반(Emergency Switchboard) 배터리 18%

수심 3,000미터 바닥에서 치솟은 거대한 진동은 물리 법칙의 한계를 비웃듯 강철 선체를 찢을 듯 뒤흔들었다.

“쿵—————!!”
그것은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21인치 라이저 파이프를 타고 역류한 미지의 초고압은, 마치 거대한 유기체가 시추선 하부를 틀어쥐고 비틀어버리는 듯한 파괴적인 비명 소리를 동반했다.

중앙 통제실 바닥 전체가 요동치며 조작 패널 위에 놓여 있던 커피잔과 전자기록 차트들이 허공으로 날아가 벽면에 산산조각 났다.

CH-01 BRIDGE // CAM-A 1998-10-13 03:14:02 KST ● REC
정전된 중앙 통제실
▲ [통제실 CCTV] 메인 배전반 연쇄 단락 직후 붉은 비상등(Emergency Light)만 켜진 선교 내부. 계기판 전원이 일제히 소등됨.

“1번, 2번 발전기 실화(Flame out)! 전압 강하 2,400볼트까지 떨어집니다!”
3등 기관사 임현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며 비상 터빈 기동 레버를 짓눌렀지만, 응답 램프는 켜지지 않았다.

“3번, 4번 터보차저 과열 폭발! 배전반 차단기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전류가…… 전류가 역류하고 있어요!”
통제실 천장의 형광등들이 귓전을 찢는 고주파 마찰음과 함께 차례로 파열했다. 팍! 팍! 파바박! 허공에서 쏟아지는 유리 파편과 함께 짙은 전기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순간—
완벽한 암흑이 찾아왔다.

[DNV-OS-E101 규정 제8조 비상 전력 전멸 경보]
메인 디젤 제너레이터 4기(24MW) 완전 트립. 4,160V 주 배전반 버스 폭발로 추진기(Thruster) 8기 구동 전면 중단.
해랑 4호, 자동 선위 유지 시스템(DP3) 영구 상실. 조류 3.2노트에 의해 표류 개시.

해양 시추 업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 그 어떤 예비 동력도, 스러스터도, 통신도 살아남지 못한 절대적 정전 상태—**‘올블랙(Total Blackout)’**이었다.

침묵이 선실을 짓눌렀다. 굉음을 내며 회전하던 환기팬들이 멈추자, 선체 외부에서 들려오는 거친 동해 바다의 파도 소리와 기괴하게 삐걱거리는 강철 기둥의 신음이 귀를 때렸다.

벽면 모서리에 매달린 축전지 비상등만이 핏빛 같은 붉은 잔광을 뿜어내며 실내를 음산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CH-04 SCADA SYSTEM // CRITICAL 1998-10-13 03:22:45 KST ● ERROR
SCADA 단말기 글리치
▲ [SCADA 터미널 CRT] 주 전원이 차단되었음에도 녹색 인광을 뿜어내며 깨진 글리치와 알 수 없는 미지의 심해 생체 신호를 출력하는 모니터.

“선장님…… 저기 모니터 좀 보십시오.”
박진석 운항사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가락을 뻗었다.

전력이 완전히 끊긴 콘솔 위, 유독 하나의 모니터만이 스스로 켜져 있었다. 해저 밸브와 파이프라인 압력을 감시하는 SCADA 구형 CRT 단말기였다.
외부 전원이 없는 터미널 화면 속에서 녹색 커서가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 BOP_HYDRAULIC_PRESS: -999.99 BAR [OVERFLOW]
> RISER_TEMPERATURE: -4.2℃ [FREEZING]
> BIO_ACOUSTIC_MASS: 4.8e+06 kg [SURFACING]
> "그들이 문을 열었다. 더 이상 숨을 쉴 필요가 없다."

“누가…… 누가 키보드를 타이핑하고 있는 겁니까?”
임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보드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엔터 키가 규칙적으로 덜컥거리며,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고대 상형문자 같은 기괴한 노이즈 코드가 끝없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치지직—
그때 벽면의 내부 인터콤 스피커에서 축축한 호흡음이 흘러나왔다.

CH-09 LOWER DECK C-CORRIDOR 1998-10-13 03:31:18 KST ● MOTION DETECTED
하부 복도를 기어가는 괴물
▲ [CCTV 채널 9] 비상 축전지로 간신히 전송된 C구역 하부 거주 복도. 붉은 조명 아래 젖은 타르로 뒤덮인 다관절 생명체가 격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장면.

벽면 모니터에 비친 하부 복도의 광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문풀(Moonpool)에서 터져 나온 흑색 원유와 진흙이 복도 바닥을 무릎 높이까지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액질 수면 위로, 핏기 없는 작업복 차림의 형체들이 관절이 꺾인 채 벽면을 긁으며 중앙 통제실 계단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선장님…… 문 열어주세요…… 바다가 너무 추워요…….”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사흘 전 머드탱크에서 실종된 최민재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음성 뒤편에는 수천 개의 젖은 입술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음산한 화음이 겹쳐져 있었다.

쿵! 쿵! 쿵!
통제실 두꺼운 방화 철문 너머에서 거친 주먹질이 시작되었다. 철문이 안쪽으로 우그러지며 틈새로 검은 타르와 역한 유황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강태식은 허리춤의 신호탄 권총을 뽑아 들고 창문을 향해 물러섰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동해의 허공.
그는 통제실 정면 강화 방탄유리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 바로 바깥, 30미터 허공의 어둠 속에서—
검은 기름을 줄줄 흘리는 거대한 사람의 얼굴이 유리창에 코를 납작하게 짓이기며 통제실 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교 방탄 강화유리 균열 감지]
쩌적—! 직경 40mm 3중 방탄유리가 안쪽으로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 얼굴의 입이 서서히 찢어지며, 사람의 것이 아닌 날카로운 가시 같은 이빨들이 드러났다.

“자침 레버 풀어!!”
강태식이 절규했다. 이 괴물들이 살아남아 육지에 닿게 둘 수는 없었다.

[다음 편 최종회 예고: 제5편(완결) - 자침과 심연의 침묵 (The Abyssal Silence)]
자침 레버가 격발되며 시추선 하부에서 터져 나오는 연쇄 폭발. 차가운 동해 바다 3,000m 심연으로 가라앉는 해랑 4호와, 그 거대한 강철 무덤을 향해 입을 벌리는 바다 밑바닥의 침묵. 그리고 사건 3년 뒤, 기밀 해제된 해군 심해 수색대의 마지막 인양 테이프에 담긴 차가운 진실.
창문 밖 기름 얼굴

[동해 울릉분지 8광구 심해저] [소설판 3편] 흑조(黑潮)의 심연 : 심해 3,000m의 눈 (The Abyssal Diver) / 시추선 '해랑 4호' 조난록

SUBSEA DEPTH (BOP 2,980m)
500m
WATER TEMP / WATER PRESSURE
8.2℃ // 50 bar
※ 화면을 터치하거나 스크롤하면 현장 계측 음향이 활성화됩니다.
DEEP SEA HARD-SF // EPISODE 03
흑조(黑潮)의 심연 제3편 : 심해 3,000m의 눈 (The Abyssal Diver)
기록: 한국석유공사 울릉분지 8광구 심해 탐사대 // 해저 2,980m 웰헤드 // 포화잠수팀 이민우
[설비 고증: 수중 폭발방지장치(BOP)와 포화잠수]
해저 2,980m에 안착된 400톤짜리 BOP(Blowout Preventer)는 비상시 두께 수십 센티미터의 강철 전단 칼날인 '블라인드 쉐어 램(Blind Shear Ram)'을 유압으로 물려 시추관을 으스러뜨리고 유정을 완전 차단한다. 원격 Mux 케이블이 끊어졌을 때 유일한 방법은 작업급 ROV(무인잠수정)와 헬리옥스 가스 가압 잠수벨(PTC)을 내려 핫스탭(Hot Stab) 유압 포트에 오일을 직접 강제 주입하는 것뿐이다.

머드 모듈의 폭발로 선체 지하 3층은 지옥으로 변했다. 강태식은 유독가스와 검은 진흙을 뒤집어쓴 채 방화 격벽을 간신히 닫아걸고 중앙통제실로 생존자들을 퇴각시켰다. 박 반장을 포함한 현장 인원 3명은 1호 머드탱크 밸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치이이익—.
통제실 통신 콘솔 앞, 서도진 기술원이 붉은색 비상 스위치 커버를 젖히며 떨리는 손으로 소리쳤다.

[감독님! 통제 불능입니다! 선내 배관 압력이 파열 한계를 넘었습니다. 지금 당장 EDS(비상 라이저 분리 시퀀스) 발동해야 합니다! 해저 연결부를 폭파하고 시추관을 끊어야 배가 삽니다!]

“안 돼.”

강태식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라이저를 그냥 끊어버리면 해저 3,000미터 유정이 완전 개방된다. 차단 밸브가 열린 채로 끊으면 섭씨 영하 2도의 저 검은 물질이 동해 심해저 전체로 뿜어져 나와. 게다가 해수면이 온통 젤 상태로 굳었는데 시추관을 끊고 표류하면 구명정 하나 못 띄우고 다 같이 굶어 죽는 거야.”

“그럼 어떡합니까! 통제실 원격 유압 신호선(Mux Cable)이 먹통입니다! 컴퓨터로는 해저 밸브를 잠글 수가 없다고요!”
“현장에 내려가서 잠근다.”

REC [PTC-BELL-CAM]
1998-10-13 03:05:12
포화잠수 챔버 하강 실황
▲ [CH-21 BELL] 헬리옥스 가스로 가압된 3인승 내압 잠수벨(PTC) 내부 이민우 팀장 하강 화면

수심 3,000미터. 수압은 300기압. 1제곱센티미터당 300킬로그램의 압력이 내리누르는 암흑의 세계였다. 인간의 육체가 직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깊이가 아니었다. 3인승 내압 잠수벨(PTC)과 티타늄 로봇 팔이 달린 작업급 심해 무인잠수정(ROV)을 연동해야만 가능한 작전이었다.

새벽 3시 05분. 선체 하부 다이빙 문풀. 잠수벨과 작업급 ROV ‘오션-아이 1호’가 윈치 크레인에 매달려 짙은 안개 속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풍덩. 잠수벨이 차가운 검은 수면을 뚫고 하강하기 시작하자, 선체 통제실의 대형 스크린 6개에 ROV가 송출하는 심해 영상이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수심 500m…… 수온 8.2℃…… 하강 속도 분당 40m 정상.]
[수심 1,800m…… 태양광 완전 소멸. 수온 2.1℃. 외벽 투광기 점등.]

수심 1,500미터를 넘어서자 바다는 완전한 무채색의 진공 상태로 변했다. 플랑크톤이나 심해 어류의 잔해인 ‘바다눈(Marine Snow)’이 눈발처럼 흩날려야 할 화면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아니, 맑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의 유기물 입자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죽은 공간이었다.

REC [ROV-SUBSEA-BOP]
1998-10-13 03:18:44
해저 2,980m BOP 폭발방지장치
▲ [CH-24 ROV-1] 수심 2,980m 해저 바닥에 안착된 400톤급 수중 폭발방지장치(BOP) 외관

[수심 2,850m…… 수압 285bar…… 수온 영하 1.8℃.]

잠수벨 안에서 이민우의 거친 숨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전해졌다. 헬륨-산소 혼합기체를 들이마시는 특유의 금속성 변조 음성이었다.

[통제실, 여기는 잠수벨. 외벽 티타늄 선체에 결빙 현상이 일어납니다. 서치라이트 유리창 겉면에 살얼음이 얼고 있어요. 라이저 파이프를 따라 유도 케이블 하강 중입니다…… 전방 50미터에 웰헤드 실루엣 식별됩니다.]

ROV의 1,000와트 LED 투광기가 해저 바닥을 비추었다. 스크린을 지켜보던 강태식과 서도진의 호흡이 동시에 멎었다.

해저 2,980미터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야 할 400톤짜리 강철 구조물, 폭발방지장치(BOP)의 모습은 처참했다.
두께 30센티미터의 특수합금 프레임이 마치 거인의 손아귀에 쥐어짜인 깡통처럼 안쪽으로 처참하게 뒤틀려 있었다.

REC [BOP-MANIFOLD-MACRO]
1998-10-13 03:22:05
BOP 강철 밸브를 휘감은 검은 유기물 촉수
▲ [CH-26 TENTACLE] 웰헤드 차단 밸브를 으스러뜨리며 박동하는 검은 유기체 혈관망

그리고 그 강철 매니폴드 주위를, 굵기 2미터가 넘는 검은 근육질의 혈관 다발들이 뱀처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BOP 틈새로 검은 점액을 분수처럼 내뿜을 때마다, 기계 외벽을 감싼 검은 유기물 표면의 피부 조직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해저 바닥을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쿵, 쿵, 울리고 있었다.

[가, 감독님…… 저건 기계 고장이 아닙니다. 시추공이 뚫린 게 아니에요. 우리가…… 무언가의 살갗을 뚫고 들어온 겁니다.]

“이 팀장, 정신 차려! 쉐어 램 핫스탭 포트 찾아! 로봇 팔로 유압 호스 꽂아야 해!”

[포트가 안 보입니다! 전부 검은 살점으로 뒤덮여 있어요! ROV 수평 이동시킵…… 어? 잠깐. 이상합니다. 음향 측심기(Sonar)가 안 먹힙니다. BOP 뒤편 해저 바닥이 평지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거긴 퇴적 진흙 평원이다.”

[아닙니다…… 수심 3,000미터 바닥 전체가…… 위로 솟구치고 있습니다!]

ROV의 카메라가 천천히 BOP 뒤편, 칠흑 같은 암흑 속 심해 평원을 향해 틸트업(Tilt-up)되었다.

투광기 빛이 닿는 어둠의 한계선.
축구장 세 개를 합쳐놓은 것보다 거대한 해저 퇴적층 전체가,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고래의 등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면을 향해 융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융기하는 검은 대지 한가운데에서—
직경 40미터에 달하는 무저갱 같은 거대한 점액질 동공이 천천히 열렸다.

가장 깊은 바다의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을 띤 그 거대한 눈동자가, 3,000미터 허공에 떠 있는 시추선 '해랑 4호'의 선저 바닥을 똑바로 응시했다.

[음향 소나 파열 및 수압 충격 경보]
파창—! 수압 한계를 버티지 못한 ROV 전면 카메라가 폭발했다.
화면이 거친 백색 잡음으로 지직거리기 직전, 통제실 스피커를 찢고 들어온 것은 수심 3,000미터 암반 전체를 진동시키는 거대하고 나지막한 저주파의 고동 소리였다.
[다음 편 예고: 제4편 - 올블랙 (Total Blackout)]
해저에서 솟구친 충격파가 라이저 파이프를 타고 선체를 강타하며 메인 발전기 4기가 전멸한다. 칠흑 같은 암전 속, 붉은 비상등 아래로 수백 개의 젖은 손들이 통제실 방탄유리를 깨부수기 시작하고…… 강태식은 최후의 자침(Scuttling) 레버를 손에 쥔다.
심연의 괴물

[동해 울릉분지 8광구 심해저] [소설판 2편] 흑조(黑潮)의 심연 : 3,200m의 불청객 (The Mud Tank) / 시추선 '해랑 4호' 조난록

MUD LINE PRESSURE (정상 45 bar)
42.0 bar
SHAKER MODULE
SCREEN ACTIVE
※ 화면을 터치하거나 스크롤하면 현장 계측 음향이 활성화됩니다.
DEEP SEA HARD-SF // EPISODE 02
흑조(黑潮)의 심연 제2편 : 3,200m의 불청객 (The Mud Tank)
기록: 한국석유공사 울릉분지 8광구 심해 탐사대 // 시추선 '해랑 4호' // 선체 최하부 머드 모듈
[설비 고증: 머드 모듈과 셰일셰이커]
해저 3,200m 드릴비트가 분쇄한 암반 파편(Cutting)은 고압 순환 진흙(Drilling Mud)과 함께 수면 위로 역류한다. 선체 지하의 셰일셰이커(Shale Shaker)는 진동 스크린으로 진흙과 암석 파편을 분리하는 핵심 기기이며, 그 뒤편의 머드탱크는 수만 배럴의 원유와 화학 첨가제를 보관하는 완전 밀폐형 고압 저장고다.

“문풀 격벽 닫아! 비상 유압 레버 당겨!”

강태식의 고함과 함께 문풀 상부의 20톤짜리 강철 방화 셔터가 굉음을 내며 맞물렸다. 쾅! 무거운 철문이 닫히며 3,000미터 바다에서 라이저 파이프를 타고 기어오르던 검은 형체들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차단문 틈새로 스며 나오는 영하의 냉기와 썩은 뻘흙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치직—.
[가, 감독님! 라이저 외벽만 문제가 아닙니다! 해저 3,200미터에서 머드 펌프로 퍼 올린 시추 진흙이…… 지금 하부 머드 처리실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셰일셰이커 스크린이 막혔다고 난리입니다!]

강태식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추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엔진실이 아니다. 해저 깊은 곳의 암반 파편과 진흙, 유독 가스가 한데 모여 걸러지는 선체 최하부의 머드 모듈(Mud Module)이었다. 그곳에 불길이 닿거나 정체불명의 고압 유체가 유입되면 4만 톤의 선체 전체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할 수 있었다.

“현장 인원 전원 대피시켰나?”

[박 작업반장이랑 시추원 두 명이 아직 셰일셰이커 룸 안에 있습니다! 배관 압력 게이지가 레드존을 쳐서 밸브를 수동으로 잠그려 들어갔는데…… 무전 응답이 없습니다!]

“내가 내려간다. 너는 통제실 문 잠그고 절대 나오지 마.”

REC [CCTV-B3-MUD]
1998-10-13 02:22:15
시추선 지하 머드 모듈 복도
▲ [CH-12 B3] 영하의 시추 진흙이 역류해 바닥이 침수된 선체 지하 3층 머드 모듈 복도

선체 지하 3층, 머드 모듈 복도는 이미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차가운 검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배수 펌프가 헛돌며 컥컥거리는 소리를 냈고, 환기 닥트에서는 얼음장 같은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덜컹덜컹덜컹—!

선별실 문을 열자, 시추 진흙에서 돌가루와 암반을 걸러내는 3대의 대형 진동체, 셰일셰이커(Shale Shaker)가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고주파로 흔들리는 금속 메쉬망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통상적인 회색 이암 파편이 아니었다.

끈적이는 검은 젤리 같은 액체 덩어리 속에 무언가 굳고 단단한 물체들이 걸려 덜컹거리고 있었다.

REC [SHAKER-SCREEN-01]
1998-10-13 02:24:40
셰일셰이커 거름망 위의 기형 척추뼈
▲ [CH-14 SHAKER] 해저 3,200m 지층에서 분쇄되어 역류한 정체불명의 유기물 골격 파편

강태식은 방독면을 고쳐 쓰고 조심스럽게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랜턴 불빛이 메쉬망 위에 걸린 이물질을 비추었다. 돌이 아니었다.

길이 40센티미터가량의, 마디마디마다 날카로운 가시 돌기가 돋아난 척추 뼈였다. 지질학적으로 지하 3,200미터는 3억 년 전 고생대 지층이다. 그 깊이에서 발견되는 화석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거름망 위에서 떨고 있는 뼈마디에는 방금 도축된 것처럼 붉은 핏줄이 선명하게 얽혀 있었고, 뼈 틈새의 검은 근육 섬유질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박 반장! 김 씨! 어디 있어?!”

강태식의 외침은 기계 소음에 묻혔다.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셰일셰이커 뒤편 2만 배럴짜리 밀폐형 제1호 머드탱크가 들어왔다.

두께 15밀리미터의 고장력 강판으로 밀폐된 탱크 하부 배출 밸브 앞에, 박 반장의 주황색 안전모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밸브 핸들은 반쯤 잠긴 채 굳어 있었고, 바닥의 진흙탕 위에는 누군가를 끌고 들어간 듯한 굵은 궤적이 1호 탱크 상부 점검용 맨홀 해치로 이어져 있었다.

그 맨홀 해치는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쿵.
정적이 내려앉은 탱크 내부에서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둔탁하고 무거운 타격음이었다. 무언가 사람의 주먹이나 이마 같은 단단한 질량이, 15밀리미터 두께의 강철 벽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타격이 가해질 때마다 페인트가 벗겨진 탱크 외벽 강판이 눈에 띌 정도로 미세하게 볼록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강태식은 렌치를 꽉 쥔 채 탱크 옆면에 달린 지름 20센티미터의 방탄 유리 점검창(Sight Glass)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두운 탱크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플래시를 비추었다.

탱크 안에는 섭씨 영하 2도의 차가운 검은 시추액이 절반쯤 차 있었다. 기름 표면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REC [MUDTANK-SIGHT-01]
1998-10-13 02:26:08 // LEVEL CALM
1호 머드탱크 내부 고요한 검은 기름 수면 검은 기름 수면 아래에서 떠오르는 실종 작업원의 얼굴
▲ [CH-16 TANK-IN] 플래시 조명에 비친 1호 머드탱크 내부 검은 시추액 표면 (정적 상태)

그리고 그 검은 수면 바로 아래, 불과 5센티미터 깊이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박 반장이 아니었다.
이틀 전, 지하 3,200미터 고압 분출이 시작되던 첫날 배관 점검 중 실종되었던 3년 차 막내 시추원, 최민재였다.

안전모도 벗겨진 채 흠뻑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얼굴. 피부는 하얗게 짓물러 있었지만, 부패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방금 찬물에 얼굴을 담근 사람처럼 생생했다.

강태식의 숨이 멎었다. 그의 시선이 시신의 두 눈으로 향했다.
민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초점을 잃은 백탁의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 강태식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민재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기포가 새어 나오는 대신, 수백 가닥의 검은 실지렁이 같은 유기체들이 혀뿌리를 뚫고 솟구쳐 나와 점검창 안쪽 유리를 찌르르르 긁어대기 시작했다.

“……가, 감독님. 밑바닥에…… 빈 공간이 있어요……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폐가 숨을 쉬고 있어요……”

[배기 밸브 파열 경보]
치직—! 무전기에서 비상 경보음이 찢어지듯 울려 퍼졌다.
[감독님! 피하십시오! 1호 머드탱크 내압 센서가 폭발 한계를 넘었습니다! 밸브가 역류합니다!]
머드탱크 상부 배기 밸브가 굉음을 내며 허공으로 튕겨 날아갔다. 수천 톤의 차가운 검은 오일이 천장을 향해 분수처럼 폭발하며 쏟아져 내렸다.
[다음 편 예고: 제3편 - 심해 3,000m의 눈 (The Abyssal Diver)]
침수된 머드 모듈을 탈출한 생존자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해저 3,000m의 폭발방지장치(BOP)를 수동 폐쇄하는 것뿐이다. 포화잠수 챔버가 칠흑의 바다로 내려가고…… 바다 밑바닥 전체를 덮은 거대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시추액 괴물

[동해 울릉분지 8광구 심해저] [소설판 1편] 흑조(黑潮)의 심연 : 한계 각도 (The Watch Circle) / 시추선 '해랑 4호' 조난록

RISER ANGLE (한계각도 2.0°)
0.4° OK
DP3 POSITIONING
8 THRUSTERS ON
※ 화면을 터치하거나 스크롤하면 현장 계측 음향이 활성화됩니다.
DEEP SEA HARD-SF // EPISODE 01
흑조(黑潮)의 심연 제1편 : 한계 각도 (The Watch Circle)
기록: 한국석유공사 울릉분지 8광구 심해 탐사대 // 시추선 '해랑 4호' // 안전감독관 강태식
[배경 제원 고증]
해랑 4호는 수심 3,000m 초심해에서 작업하는 6세대 반잠수식 시추선이다. 해저면에 내리는 닻(앵커)은 존재하지 않으며, 선체 하부 8기의 아지무스 스러스터가 24시간 추진력을 제어하는 DP3(Dynamic Positioning) 시스템으로만 제자리를 유지한다. 선체와 3,000m 아래 해저 유정을 잇는 것은 직경 21인치의 '머린 라이저(Marine Riser)' 단 하나이며, 배가 조류에 밀려 허용 각도 2.0도(Watch Circle 30m 반경)를 벗어나면 파이프가 파단(破斷)되어 폭발한다.

새벽 2시 14분. 동해 울릉분지 제8광구, 포항 동남쪽 290킬로미터 공해상.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뜬 반잠수식 시추선 ‘해랑 4호’는 거대한 강철 섬이었다. 수면 아래 잠긴 두 개의 거대한 부력체(폰툰)와 갑판을 떠받치는 네 개의 수직 기둥(컬럼) 아래로는 3,000미터의 수심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REC [CCTV-EXT-01]
1998-10-13 02:14:18
해랑 4호 야간 원경
▲ [CH-01 EXT] 폭풍우와 짙은 해무 속에 정박 중인 반잠수식 시추선 '해랑 4호' 야간 실황

시추선과 3,000미터 아래 해저 바닥을 물리적으로 잇고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선체 정중앙을 수직으로 관통해 바다 밑바닥의 폭발방지장치(BOP)까지 뻗어 있는 직경 21인치의 강철 파이프, 머린 라이저(Marine Riser).

해저 3,200미터 지층에서 시작된 비정상 역류(Kick)가 3,000미터 라이저 파이프를 타고 선체까지 치밀어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40분뿐이었다.

“온도가 영하 2도입니다. 점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중앙통제실(CCR) 계측 콘솔 앞, 서도진(32) 기술원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모니터에는 해저 시추관을 타고 역류하는 이물질의 데이터가 붉은색 그래프로 요동치고 있었다.

“원유가 아닙니다. 탄화수소 반응이 전혀 안 잡혀요. 섭씨 영하 2도인데 얼지도 않고 액체 상태로 뿜어져 나옵니다. 밀도는 담수의 1.4배…… 진흙 순환 펌프(Mud Pump) 압력이 분당 30바(bar)씩 치솟고 있습니다.”

안전감독관 강태식(48)은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23년간 북해와 인도네시아, 동해의 가스전을 전전한 베테랑이었지만, 영하의 온도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하며 3,000미터 수압을 뚫고 역류하는 물질은 본 적도 없었다.

“초크 밸브(비상 감압 밸브) 20퍼센트 열어. 배관 터지기 전에 압력부터 분산시켜라.”
“하지만 감독님, 바다로 직접 배출하면 해양 오염 규정 위반입니다!”
“규정이 문제야? 라이저 파이프 터지면 이 배에 탄 78명 전원 수장이다. 일단 감압해.”

REC [HELI-DECK-CAM]
1998-10-13 02:15:32
헬리데크 바다 안개
▲ [CH-04 HELI] 해수면에서 솟구친 차가운 유체로 인해 헬리데크에 발생한 이상 농무(海霧)

갑판으로 나서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다.
기온은 영상 14도였지만, 바람에 실려 오는 공기는 냉동고 문을 열었을 때처럼 차가웠다. 해저 3,200미터에서 뿜어져 나온 영하의 검은 액체가 수온 18도의 동해 표면과 부딪히며, 시추선 주변 반경 1킬로미터 해상을 짙은 바다 안개(海霧)로 뒤덮어버린 탓이었다.

눈앞은 온통 우윳빛 장막이었다. 헬리데크 바닥의 붉은 유도등조차 10미터 앞에서는 흐릿한 점으로 번져 보였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비린내가 났다. 경유 냄새가 아니라, 햇볕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깊은 바다 진흙에 썩은 지방질을 짓이겨놓은 듯한 역겨운 악취였다.

치직—.
[해랑 4호! 여기는 해경 502편! 귀함 유도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전파고도계가 미쳤다!]

“여기는 안전감독관 강태식. 유도등 스물네 개 전원 정상 점등이다. 수직 강하 각도 유지하라.”

[안 보인다니까! 고도계가 해수면보다 40미터 위에 단단한 암반 지면이 있는 것으로 잡힌다! 전방 100미터가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는 걸로 나온다고! 기압 고도계도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친다! 외기 온도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고 있어! 조종간이 안 먹힌다! 밑에서…… 밑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빨아당기고 있—!]

[충돌 감지]
쿵—. 충돌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젤리 덩어리 위에 수십 톤의 강철을 떨어뜨린 것처럼, 낮고 축축한 파동이 선체 바닥을 울렸다.
REC [PONTOON-SURFACE]
1998-10-13 02:16:04
바다를 뒤덮은 검은 기름 피막
▲ [CH-08 SUB] 헬기 추락 직후 점성화되어 파도가 멈춘 남서쪽 폰툰 수면

38미터 아래 바다를 향해 투광기를 비춘 강태식은 숨을 삼켰다.
그곳에는 파편도, 화염도 없었다. 바다가 굳어 있었다.

너울성 파도가 몰아쳐야 할 해수면이 매끄러운 검은 타르 피막으로 덮여 있었다. 헬기의 주 회전날개 하나가 수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지만, 검은 액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소화액처럼 날개 표면을 천천히 감싸 쥐며 수면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위잉— 위잉— 위잉—!
선내 스피커에서 귀를 찢는 주 알람이 울려 퍼졌다. 시추선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좌현으로 3도 기울었다.

[감독님! 4번, 6번 스러스터 과부하 정지(Trip)! 추진기 스크루에 엄청난 양의 섬유질 점액이 엉켜 붙었습니다! DP 위치 제어 상실! 배가 남동쪽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웰헤드 이탈 각도 1.4도…… 1.7도! 라이저 파이프 한계 각도까지 0.3도 남았습니다!]

8개 중 2개의 추진기가 멎자, 4만 5천 톤의 선체가 조류를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각도가 2.0도를 넘는 순간 3,000미터 강철 파이프는 파단(破斷)된다.

강태식은 계단을 뛰어내려가 선체 한가운데, 시추 파이프가 바다로 관통해 들어가는 지름 15미터의 거대한 수직 개구부인 문풀(Moonpool)로 달렸다.

철제 그레이팅 발판에 도착한 강태식은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로 내려가는 21인치 라이저 파이프를 붙잡고 있는 유압 텐셔너 실린더 여섯 개가 찢어질 듯한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압력 게이지의 바늘은 위험 수위인 600톤을 넘어 꺾여 있었다.

조류 때문이 아니었다.

조명이 비춘 짙푸른 문풀 수면 아래, 해저 3,000미터에서부터 수직으로 솟아오른 굵은 파이프 외벽을 칭칭 감아 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의 팔과 흡사하지만 마디가 대여섯 개로 꺾인 검은 유기물 덩어리 수백 개가, 파이프의 차가운 강철을 움켜쥐고 젖은 소리를 내며—
시추선 바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편 예고: 제2편 - 3,200m의 불청객 (The Mud Tank)]
문풀의 방화 격벽을 간신히 폐쇄한 강태식. 그러나 해저 3,200m 암반 흙을 걸러내는 셰일셰이커 위로 쏟아져 내린 것은 기괴한 척추 뼈들이었고…… 1호 머드탱크 안쪽에서 48시간 전 실종된 최민재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문풀의 괴물